도서정보
제목 : 아몬드
저자 : 손원평
당부의 말
필자는 글재주가 없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언어능력도 퇴화하고 있다.
30대를 넘어서부터는 "거시기"라는 단어 하나로 대화의 대부분을 대체하고 있었다.
점점 단어도 까먹어 가고, 긴 문장을 말할 때 어려움이 느껴지기 시작한 뒤로 책을 부단히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읽기만 해서는 표현력이 늘지 않았다. 전문적인 글쟁이는 아니지만 독후감을 써서 언어능력을 되살려보고자 한다.
즉, 이 독후감은 순전히 본인을 위한, 젊은 치매를 막기 위한, 한 번 읽은 책 내용을 잊지 않기 위한 내용임을 밝혀둔다.
줄 거 리
윤재는 태생적으로 편도체가 작게 태어났다(알렉시티미아, 즉 감정 표현 불능증). ‘아몬드’모양을 닮은 이 편도체의 크기가 정상보다 작을 때, 사람은 공포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는 공포의 감정뿐 아니라 슬픔, 분노, 사랑 등의 모든 감정으로 확대하여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짧은 찰나에는 장점으로 보였다. 소심한 성격상, 무서울 게 없고 두려울 게 없이 세상을 대담하고 당당하게 맞서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아주 조금만 곱씹어보면 공포라는 감정 하나만 결핍되어도 사람이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부모님들은 어린 아이들에게 가르쳐준다. “저건 위험한 거야.”, “저럴 때는 피해야 돼.”, “저러면 ‘아야’해.” 등등. 아이들은 교육과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있는 본인만의 위험감지센서가 작동해 이러한 위험을 사전에 피할 수 있다. 하지만 공포가 결핍된 자는 왜 피해야 하는지, 이 상황이 나에게 왜 위해가 되는지를 이해할 수 없고, 다만 학습을 통해서 모든 상황을 암기하여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
윤재의 엄마와 할머니도 강남엄마 치맛바람이 무색할 만큼 감정학습에 열정을 들였다. 상황과 결과, 예상 질문과 대답, 감정과 표정의 표현, 남들은 설명하지 않아도 느끼는 감정에 대한 사전적 의미 등. 하지만 살아가며 겪는 상황은 너무 많았고 상대방의 말에 감추어진 의미가 너무 다양했으며 그때그때 암기한 표정을 짓는 것도 타이밍 맞추기가 힘들었다.
부모의 바람은 크지 않았다. 그저 튀지 않기를. 그래서 괴롭힘 당하지 않기를. 남들처럼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했다.
수많은 변수가 있겠지만 오래도록 이러한 가정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면 대부분의 상황에 연기를 할 수 있는 학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렸다. 그것도 하필 크리스마스 이브. 윤재의 생일날에.
윤재의 생일은 연례행사처럼 가족외식을 하는 날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세 사람은 근처 국숫집에서 행복한 순간들을 보냈고, 먹을 때마다 사탕에 혀가 베어 비릿한 피맛이 느껴지는 자두사탕을 두 손 가득 선물처럼 받아든 그날. 엄마와 할머니가 묻지마 괴한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물론 윤재는 그 상황이 주는 분위기를 읽을 수 없어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사건 이후 윤재는 비범한 아이. 감정이 없는 아이. 가족이 죽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아이로 못 박히게 되고 철없는 아이들의 사냥감이 된다.
곤이라는 아이가 있다. 의사 아버지와 유명기자 엄마라는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나들이 길에서 엄마의 손을 놓치는 바람에 고아신세가 되어 거리를 전전하기도, 다른 가정에 입양되기도 하며 혼란스러운 유년기를 보냈다. 마음의 상처를 입을 대로 입은 상태에서 가까스로 부모를 찾기는 했지만 엄마는 아들을 잃어버린 후 생긴 병으로 이미 세상을 떠났고, 아빠는 삐뚤어진 아들을 포용할 수 없어 점차 곤과 거리를 둔다.
윤재는 감정이 결핍되어 있고, 곤은 지나치게 많은 쓰라린 감정들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둘은 또래에 비해 힘겨운 시간들을 겪었다는 점에서는 아픈 기억이 많아 서로 끌렸는지도 모른다.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에서, 동정과 호기심으로, 또다시 우정으로 발전하는 모습이 가슴 뭉클하게 만든다.
곤에게서 서툴지만 아픔, 고통, 슬픔 등을 배웠다면 도라에게는 사랑을 배우게 된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이 뺨에 와 닿는 감촉에 설레어 잠 못 들기도. 저 멀리 서 있던 작은 점같던 도라의 모습이 점차 가까워지며 실체가 되었을 때 심장이 두방망이질치기도 하는 모습에 본인도 퍽 난감하다.
처음으로 우정에 대한 감정을 느끼게 해 준 곤이 위기에 처하자, 이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진 윤재가 대신 크게 다치게 되고 오랜 치료 끝에 병원에서 눈을 뜬 그에게 많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혼란스럽다. 이윽고 혼수상태의 엄마가 깨어나 모습을 나타냈을 때 윤재는 마침내 눈물을 흘릴 만큼 감정이 자라나 있었다.
성장하면서 뇌의 편도체도 같이 자라난 것인가 아니면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감정을 배우게 된 것일까.
감정결핍자들도 주위의 관심과 충분한 교육으로 정상인과 같은 감정을 배워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성장드라마 같다.
또한, 저자는 계속해서 윤재 가족의 처참한 살해 장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저 방관하기만 했냐는 것이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이성을 잃고 서슬이 시퍼런 칼을 난폭하게 휘두르는 그 살인자를 막을 수 있었을까? 머릿수가 우리가 훨씬 많으니 힘을 합쳐 다 같이 막아보자며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을까? 재빨리 경찰에 신고를 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나와 상관없어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멀리서 구경만 하고 있을까?
인상적인 구절
#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예감이라는 게 ‘그냥 문득 느껴지는’건 아니다.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들은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조건과 결과로 나뉘어 차곡차곡 쌓인다. 그러다보면 비슷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 무의식적으로 결과를 예측하게 된다. 그러니까 예감이란, 사실은 매우 인과적인 데이터다. 과일을 믹서에 갈면 주스가 될 것을 아는 것처럼.
# 할멈의 표현대로라면, 책방은 수천수만 명의 작가가 산 사람, 죽은 사람 구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인구 밀도 높은 곳이다. 그러나 책들은 조용하다. 펼치기 전까지 죽어있다가 펼치는 순간부터 이야기를 쏟아 낸다. 조곤조곤. 딱 내가 원하는 만큼만.
'도서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후감] 제노사이드 (스포일러) (0) | 2019.08.30 |
---|---|
[독후감] 아르테미스 (스포일러) (0) | 2019.08.20 |
[독후감] 구의 증명 (스포일러) (2) | 2019.07.19 |
[독후감] 보건교사 안은영(스포일러) (2) | 2019.06.27 |